의도치 않은 차별에도 마스크가 필요하다: '블랙페이스' 이슈와 관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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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적 인식은 고정되지 않고 흐른다

아이와 공터에 나가 답답함을 달래보고자 승강기에 올랐다. 그런데 평소 알고 지내 온 위층 어르신께서 입을 손으로 막고 계신 게 아닌가? 가만 보니 마스크를 하지 않으셔서 그랬던 모양이다. 한 손엔 음식물 쓰레기가 들려 있다. 바로 코 앞이니 그사이 누굴 마주치지 않으리라 생각하셨던 거다. 어르신의 배려 깊은 손길에 한껏 더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바이러스라는 녀석이 참 나쁜 게 의도치 않은 전파를 매개로 옮겨 다닌다는 거다. 감염이니 뭐니 안 좋은 소식의 주범은 바이러스인데 온통 사람들이 욕을 먹고 골머리를 싼다. 그래도 오랜 세월 발을 디딘 인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바이러스를 잡더라도 서로 의도치 않은 감염이 생기지 않게 힘껏 배려해야 자신의 몸도 지킬 수 있다는 걸 말이다.

사실 마스크를 쓰는 일도 그간 얼마나 말이 많았나? 당최 마스크 착용일랑 하지 않겠다는 사람들부터 코 밑으로 제껴 쓰는 턱스크까지 처음엔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반년이 지난 지금은 제법 사람들이 공통된 인식을 안고 있다. 물론 법적 강제라는 변수가 더해지긴 했지만, 재난 상황이라는 변수가 어마무시한가 보다.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던 인식이 이렇게 금세 바뀌는 걸 본 일이 없다.


2. 학습의 문제보다 앞서는 힘의 문제들

마스크 착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는 걸 보며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문제 인식도 이처럼 진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얼마 전, 샘 오취리와 의정부고 학생들 그리고 누리꾼 간에 있었던 ‘블랙페이스’ 이슈도 마찬가지다. ‘관짝소년단’ 영상을 패러디한 의정부고 학생들이 연출과정에서 ‘블랙페이스’를 한 게 화근이었다. 샘 오취리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저희 흑인들 입장에서 매우 불쾌한 행동입니다. 제발 하지 마세요. 문화를 따라 하는 건 알겠는데 굳이 얼굴 색칠까지 해야 돼요?”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누리꾼 가운데 일부는 “학생들이 인종차별 의도가 없어 보이는데 과한 지적 아니냐” 혹은 “흑인이 까만 것은 사실인데 그럼 어떻게 따라 해야 하냐”며 되려 샘 오취리를 몰아치며 방송 하차까지 요구했다. 불쾌감을 드러낸 지적에 상응하는 사과면 충분하겠다 싶은데 일부 누리꾼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결국 샘 오취리는 공식 사과를 하고 방송에서 자진 하차했다.

문제를 제기한 당사자가 도리어 사과하고 거취를 스스로 삭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공론장에서 철저히 음소거를 이행한 일련의 행동이 아프게 다가온다. 아마도 이 모든 걸 자의로 행하도록 몰아간 타의의 궤적을 더 크게 느껴서인가 보다.

이런 느낌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샘 오취리를 몰아간 누리꾼의 행태를 향한 지적도 많았다. 즉 서구사회에선 블랙페이스를 인종차별의 기호로 인식한 지 오래인데, 그간 한국은 빗겨 서 있었을 뿐이라며 학습의 필요성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분명 서구사회와 우리는 지나온 맥락이 다르다. 시대를 관통하며 겪어온 갈등의 요소가 다르고 이를 봉합해 온 발자취도 다르다. 인종차별도 그중 하나다. 다만 이제 우리가 겪고 있을 따름이다. 학습이 주는 이점은 갈등의 접점을 회피하는 자기 기제를 길러준다는 데에 있다. 소위 시민사회 주체 양성을 위한 교양 학습은 대체로 이러한 자기 기제를 내면화하는 걸 목표로 삼는다.

블랙페이스와 관련하여 인종차별을 방지하는 교육의 필요성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공론화하는 이슈가 생길 때마다 학습의 요소를 추가하는 건 다소 임시처방 같아 보인다. 원론에 입각한 각론의 세분화이겠으나, 블랙페이스처럼 ‘의도치 않은 차별(micro-aggression)’에 대한 사안별 학습은 ‘어디까지가 차별인가?’와 같은 반문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공론장 내에 유사 상황들이 반복하여 이슈로 부상한다고 해서 학습효과가 배가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이슈라도 변수가 바뀌면 결과도 바뀐다. 사실 블랙페이스 이슈도 마찬가지다. 2017년에도 블랙페이스 논란은 있었다. 심지어 당시 문제를 제기한 이는 다름 아닌 샘 오취리였다. 대신 다른 변수가 있었다. 최초 문제 제기자는 샘 오취리가 아닌 샘 해밍턴이었다. 해밍턴의 비판이 먼저였고, 오취리는 그 후였다. 누가 먼저였는지 따지려는 게 아니다. 해밍턴과 오취리를 각기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인식 격차가 주요 변수다. 백인과 흑인, 출신 국가에 대한 상대적 이미지는 공론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 두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격차를 주었다. 참고로 당시 이슈는 지금처럼 격한 역풍을 맞지 않았다. 결국 가나 출신 흑인인 오취리에게 유독 매서운 공론장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의정부고 블랙페이스 이슈의 변수를 바꿔서 상상해 본다. 만일 공론장에 화두를 던진 이가 샘 오취리가 아닌 타일러 라쉬였다면 어땠을까? 샘 오취리에게 가한 것처럼 타일러 라쉬에게도 역공을 퍼부었을까? 글쎄다.

인종차별을 지적하는 ‘메시지(message)’가 튕겨 나오는 게 아니다. 어떤 메신저(messenger)’가 말했는가를 보고 튕겨내는 거다. 화두를 던진 메신저의 사회적 무게를 달아보고 상대가 가볍다 싶으면 튕겨내는 작동방식이다. 그런데 공론장에서 불거져 나오는 이슈 가운데 인종차별만 그러할까? 노동, 여성, 아동 등등. 사실 죄다 마찬가지다. ‘사회적 약자’라는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 결국 힘이 근원적인 변수이기 때문이다.


3. 힘의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다섯 살 첫째는 10개월짜리 둘째와 즐겨 논다. 부모로선 다행이다. 때론 말하지 못하는 둘째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는데, 상황마다 대처 방법을 일일이 첫째에게 알려주진 않는다. 자신의 행동이 상황별로 매뉴얼에 따라 통제당한다고 느낄까 봐서다. 대신 첫째에게 동생과 어떻게 다른지 차근히 설명한다. 특히 각자 해낼 수 있는 힘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알려준다. 다행히 말귀를 알아듣는 다섯 살이라 그런지 동생과 어울리면서 수시로 동생이 어떻게 느끼는지 살핀다.

비단 아이들 관계만 그런 것 같진 않다. 어른들 관계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홀로 세상에 살 거라면 자신이 타인을 향해 발산하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타인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힘을 가늠하고, 타인을 의식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이처럼 성찰과 실천을 오롯이 내면화할 때 진정한 주체로 선다. 하지만 현실은 내면화 과정을 탈거한 군상들만 빼곡한 것처럼 보인다. 라울 바네겜(Raoul Vaneigem)의 지적대로 “진정한 주체로 서지 못한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 위에 자신의 주권을 세우곤 한다. 노예의 품행이다.” 타인을 밀어내고 자신의 영역을 확고히 하지만 정작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건 자기인 셈이다.

성찰과 실천이 고단하게 느껴진다면 하다못해 타인과 접점을 이루는 소통의 창에 기계적으로나마 기름칠을 하면 좋겠다. 때론 거친 속마음을 매끄러운 얼굴로 감추는 게 관계를 이롭게 할 때가 있다. 가면을 집어 던지고 쉬이 쏟아낼 작정이면 자기 오판의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그럴 만한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가면을 쓰고 있자. 괜한 생채기를 온 데 사방 흩뿌리며 살아가는 게 세상살이의 표준은 아니다.


4. 교회는 일반사회 공론장과 얼마나 다를까?

교회라는 장(場)은 어떨까? 일반사회 공론장과 얼마나 다를까? 사실 교회만의 특수성이 배어나는 또 다른 양상의 의도치 않은 차별이 있을까 싶어 사례를 수집하다 손을 놓았다. 왜냐하면 일반사회 공론장과 교회라는 장은 서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포함 관계이기 때문이다. 일반사회 공론장을 모집단 삼아 교회는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일종의 부분 집합인 셈이다.

따라서 ‘일반사회에서 이런 이슈가 있었는데 교회에서도 그런 이슈가 있더라’라는 말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동시대를 사는 인물들이 그대로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기에 일반사회의 이슈가 교회 안에서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껏 다뤄 온 블랙페이스 이슈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의도치 않은 차별도 마찬가지다. 모집단이 그러한데 부분 개체가 다를 리 만무하다.

다만 교회라는 장은 조금 독특하다. 모집단의 비율을 그대로 축소한 표본이라기보다는 상당히 편향됐다. 대체로 ‘중년, 남성, 보수’와 같은 범주들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세대, 성별, 정치의 스펙트럼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뜻이다. 물론 교회 안에도 청년, 여성, 진보 등의 속성을 가진 개체들이 포진해 있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그림자처럼 묵음 처리된다. 의사결정 구조가 중년, 남성, 보수를 중심으로 닫혀있기 때문이다.

그간 교회가 보인 왜곡된 표상들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다. 스스로 문을 닫아 걸은 교회 안의 주체들이 제 구미에 맞는 것들만 취사선택한 결과다. 특히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중심축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의 가짓수는 넘쳐나는데 이웃사랑의 방법은 늘 고정되어 있다. 엄밀히 말해 신앙 또한 인식의 영역인데, 인식의 길을 편향되게 냈기에 이런 사달이 났다.


5. 성도, 다르게 사는 사람들

공론장에는 관성에 따른 인식 경향을 그대로 답습하는 개체들만 있는 게 아니다. 관성의 흐름을 내면화하지 않고 저항하는 개체와 집단들도 많다. 사실 교회도 그 중 하나다.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쿨랑주(Coulanges)의 『고대도시』를 보면, 기독교가 전파되기 이전까지 얼마나 혐오와 차별이 공론장에서 횡행했는지 알 수 있다.

“고대사회 즉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은 의무였다.” (쿨랑주, 『고대도시』, 532)

이는 물론 자국민에 대한 권리를 우선시한 결과였다. 하지만 고대사회의 이러한 도그마를 밀어낸 요인 중 하나는 바로 기독교였다. 이방인에 대한 혐오나 차별 없이 처음부터 기독교는 ‘온 인류’를 받아들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혐오와 차별이 의무이던 시대에 경계를 지우는 작업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복음의 능력이 배척의 법을 대체한 것이다. 적어도 당시의 기독교는 그랬다. 그러나 오늘날엔 순수한 복음을 회복하기 위해 초기 기독교의 흔적을 되짚어야 한다면서 어쩜 그렇게 유형의 교회 즉 조직 안정성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자들이 많은 건지. 답답한 일이다.

“기독교는 더 이상 민족들 사이에 증오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며, 이방인을 혐오하는 것을 시민의 의무로 만들지 않았다. 반대로 시민은 이방인에 대해, 적에 대해 정의뿐만 아니라 심지어 호의의 의무를 지닌다고 가르치는 것이 본질이 되었다.”(쿨랑주, 『고대도시』, 536)

이처럼 초기 기독교는 공론장 안에서 장벽을 낮추고 경계를 허무는 실천을 했다. 정치적 식견에 따른 급진성이 아니라 신앙의 빛에 비추어 행한 일들이었다.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신 교회라는 장은 당시 시민사회 공론장과 달랐다. 이방인이나 나그네라고 하여 밀어내지 않았다. 도리어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교회 안으로 받아들였다. 즉 공론장 내의 인식 경향을 그대로 내면화하지 않고 교회라는 장 안에서 전복시킨 셈이다.


6. 공감의 창을 내는 교회를 위하여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충만했던 대사회적 복음의 능력이 왜 오늘날에는 미진한 걸까? 조직 안정성을 위한 감각은 최대치로 활성화됐으나 이타적 공감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신앙인들을 교회가 양산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소시오패스 같은 공감 능력 결여자들이 기독교인 가운데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성찰을 배태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드러운 메시지가 과포화되기까지 교회 내 주체들이 끊임없이 공모한 까닭이다. 하나님을 위한 교회라 포장하지만, 자기 인식 과잉을 위하여 하나님을 소환하는 동력 장치로 만들어 버렸다. 우상이다.

우상숭배가 별다른 게 아니다. 교회가 공감의 창을 없애고 하나님을 위하는 척 자기에만 골몰하는 순간 우상숭배로 뻗어간다. 하나님 찾기를 그토록 사모하는 한국교회들이 자기 폐쇄적 우상숭배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감의 창이 필요하다. 공론장의 인식 경향을 거스르는 급진성까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기엔 조그만 창조차 내지 못한 채 지낸 세월이 길다. 환기가 우선이다.

둘씩이나 되는 귀는 언제나 열려 있는데 하나뿐인 입은 다물게끔 되어 있는 신체를 생각한다. 기능은 서로 다를지라도 외부와 접점을 이루는 두 신체 기관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공감의 창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귀를 여는 만큼 이웃의 소리를 듣는 귀도 열자. 그리고 입을 분주히 열기보다 닫힌 입술까지 생각이 차오르도록 여유를 두자. 실천의 번거로움을 이유로 쉬이 포기하지 말자. 약간의 힘을 들여 생각하는 매 순간이 의도치 않은 차별을 거두는 마스크 역할을 할 것이다.


글쓴이 안동석 목사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매체철학문화연구저널리즘 등이 주된 관심사라고 말하고 다닌다글쓰기란 결국 억눌린 의식의 배설이라 느끼며이따금씩 차오를 때마다 싸지른다왕창.


<참고문헌>

Numa Denis Fustel de Coulanges (1864). La Cité antique: Etude sur le culte, le droit, les institutions de la Gréce et de Rome. 김응종 역(2000). 『고대도시: 그리스·로마의 신앙, 법, 제도에 대한 연구』. 아카넷. 532-536.

Raoul Vaneigem (1967). Traité de savoir-vivre à l′usage des jeunes générations. 주형일 역(2017). 『일상생활의 혁명: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 갈무리. 47.

김교석(2020.9.4.). “샘 오취리를 기필코 끌어내리고 말겠다는 사람들에게”. 엔터미디어.

백승주(2020.8.20.). “샘 오취리는 다시 거울이 됐다”. 한국일보.

심윤지(2020.8.14.). “의정부고 관짝소년단이 왜 인종차별인지 헷갈리는 당신에게”. 경향신문.

이은혜(2020.9.11.). “[이주민과 차별금지법④] 정의당 이주민인권특별위원회 이자스민 위원장". 뉴스앤조이.

이한호(2020.8.8.). “의정부고 ‘관짝소년단’에 드리운 ‘블랙페이스’의 그림자”. 한국일보.

하재근(2020.8.15.). “샘 오취리가 쏘아 올린 ‘블랙페이스’ 논란”. 시사저널.

“우리는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 (2020.9.2.). <기독청년호소문>. 한국기독청년협의회.

“먼지 같은 차별도 있습니다”. (2020.9.8.). 지식채널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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